부모님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본 분이라면 아실 겁니다. 기계가 숨을 대신 쉬어주는 병실, 그 앞에서 "이게 맞는 건가" 자문하며 무너지던 그 감정을. 저도 그 자리를 지나왔고, 결국 얼마 전 동사무소를 찾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직접 서명하고 돌아왔습니다. 50대에 너무 이른 결정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지만, 그 서류를 서랍에 넣는 순간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습니다.

1. 300만 명이 선택한 이유: 학습된 세대의 결단
2025년 8월 기준,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가 3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. 2018년 제도 도입 첫해 8만 명 수준이었던 것이 7년 반 만에 이룬 숫자입니다. 전체 성인 인구의 약 6.8%에 해당하며, 특히 65세 이상 여성은 4명 중 1명꼴로 이미 서명을 마쳤습니다(출처: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).
여기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란,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았을 때 심폐소생술, 인공호흡기, 혈액투석 등의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문서로 남겨두는 제도입니다. 쉽게 말해, 아직 건강할 때 "기계로 버티는 삶은 원하지 않는다"는 뜻을 법적으로 명확히 해두는 것입니다. 19세 이상이라면 전국 556개 지정 등록기관에서 누구나 작성할 수 있습니다.
저 역시 이 통계에서 여성 등록자가 남성의 두 배라는 대목을 보며 씁쓸하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.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의 임종을 모두 곁에서 지킨 우리 세대 여성들은, 연명의료가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연장시키는 현실을 몸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. 아는 만큼 빨리 결정하게 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.
저 역시 "자식이 나중에 어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뗄지 말지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다"는 마음이 컸습니다. 그게 제가 줄 수 있는 마지막 모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. 유언장이 아니라, 내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내가 직접 쓰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.
2. 현행법의 한계: '임종기'에 갇힌 자기결정권
문제는 제도의 실효성입니다.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'임종 과정'에 있는 환자에게만 허용하고 있습니다. 여기서 임종 과정이란,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수일 내 사망이 예상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. 하지만 실제 의료현장에서 이 시점을 정확히 판단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. 집중 치료를 받으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있고, 반대로 너무 늦게 판단이 내려지기도 합니다.
결국 현실에서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임종 과정을 수일 앞당기는 데 그친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. 저도 이 대목이 가장 답답합니다. 제가 원하는 건 "마지막 사흘을 기계 없이 보내는 것"이 아니라,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는 시점부터 온전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.
이에 대한 개선 논의가 의료계와 국회 양쪽에서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. 연세대 산학협력단의 연구에 따르면, 관련 의학회 27곳 중 22곳이 연명의료 중단 시점을 현행 '임종기'에서 '말기'로 확대하는 데 찬성했습니다. 여기서 말기란, 수개월 이내 사망이 예상되는 상태를 의미하며, 임종기보다 훨씬 앞선 시점입니다. 쉽게 말해, 죽음이 임박한 마지막 며칠이 아니라 회복 가능성이 사실상 소진된 시점부터 환자 본인의 결정을 존중하자는 것입니다(출처: 보건복지부).
현행 제도의 주요 한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.
- 연명의료 중단 가능 시점이 '임종 과정'으로 좁게 한정되어 실질적 효과가 제한적
- 의료현장에서 임종 과정 판단이 어려워 결정 시기가 지연되는 사례 빈번
- 말기 환자 단계에서는 환자 본인의 의사가 있어도 법적으로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없음
- 환자·가족의 경제적·정서적 부담이 법적 보호 없이 그대로 전가됨
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성인 1,02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91.9%가 말기 환자가 됐을 때 연명의료를 중단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고, 조력 존엄사 합법화에도 82.0%가 찬성했습니다. 이 숫자는 제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.
3.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: 의향서 작성부터 시작하세요
저 역시 처음에는 막연했습니다. "동사무소에 가서 뭘 어떻게 하면 되지?"라는 생각으로 검색을 한참 했던 기억이 납니다. 실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간단했고, 직원이 충분히 설명을 해준 뒤 서명하는 방식이라 두렵지 않았습니다.
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절차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.
- 전국 556개 지정 등록기관(주민센터, 의료기관, 건강보험공단 지사 등) 방문
- 담당자의 충분한 설명 청취 (연명의료의 종류, 호스피스 의미 등 안내)
- 본인 서명 후 등록 완료 (19세 이상이면 누구나 가능)
- 등록 후에도 언제든 열람·변경·철회 가능
여기서 호스피스란, 완치가 어려운 말기 환자에게 통증 완화와 심리적 지지를 제공해 남은 시간을 존엄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돕는 의료 서비스를 의미합니다. 의향서를 작성할 때 호스피스 이용 의향도 함께 기재할 수 있습니다.
제 경험상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, 가족에게 미리 알려두는 것입니다. 서류가 있어도 가족이 모르면 실제 상황에서 혼선이 생길 수 있습니다.
저는 의향서를 작성한 날 저녁, 아이에게 "엄마는 이런 결정을 했다"고 직접 이야기했습니다. 처음에는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, 설명을 들은 뒤 "잘 하셨어요"라고 했습니다. 그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.
법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지만,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습니다. 300만 명이 보내는 신호가 결국 법을 바꾸는 동력이 될 것이고, 저는 그 흐름에 기꺼이 함께하고 싶습니다.
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. 제 서랍 속 의향서는 오히려 남은 50대를 더 치열하게, 더 당당하게 살겠다는 다짐과 맞닿아 있습니다. 아직 작성하지 않으셨다면, 가까운 주민센터에 한 번 들러보시길 권해드립니다.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그 서류가, 생각보다 훨씬 단단한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.
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, 전문적인 의료·법률 조언이 아닙니다. 구체적인 사항은 반드시 의료 전문가 또는 관련 기관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.
참고: https://health.chosun.com/site/data/html_dir/2025/08/11/2025081101847.html
'여유로운 노후를 위해 50대에 해야할일' 카테고리의 다른 글
| 부모 책임론- 자녀 성공, 경제 지원, 노후 준비 (0) | 2026.03.31 |
|---|---|
| 빈 둥지 증후군 극복: 아이방 비우기, 내 작업실로 리모델링, 식물과 와인의조화 (0) | 2026.03.29 |
| 50대 엄마의 블로그 도전기: 살림 노하우부터 반려 식물 기록, 디지털 소통까지 인생 2막 여는 법 (0) | 2026.03.27 |
| 60대 이후 '방콕' 탈출법: 50대에 준비하는 운전면허 반납 시나리오와 스마트폰 호출, 슬세권과 의세권 거주 전략 (0) | 2026.03.26 |
| 행복을 미루지 않는 50대의 버킷리스트: 나만의 몰입 찾기, 혼밥의 용기, 그리고 다리 떨리기 전에 떠나는 여행 (0) | 2026.03.25 |